1 다큐멘타리에 담아 내기엔 아쉬운 맨살
최근 EBS 다큐 프라임, 한국인과 영어, 2부 조선, 영어를 만나다를 보았습니다. 이 다큐는 잘 정리된 한국의 영어 수용기쯤으로 정리 할 수 있는데요. 이 다큐멘터리를 다 보고 나면 약간의 씁쓸함이, 아쉬움이 남습니다. 이유는 영어를 잘하는 사람이 잘 되는 문화가 바로 100여년 전 부터 생겼다는 겁니다. 영어만 잘하는 사람이 필요한 세상을 저는 참 씁쓸하게 생각합니다. 컨텐츠가 있고, 영어를 잘해야지, 자신의 것은 하나도 없이 영어만 잘해도 뭔가 되는 세상은 참 아쉽기만 합니다. 이런 아쉬움은 잠시 뒤로 하고, 다큐멘터리의 내용 소개로 들어가겠습니다.
2 조선과 영어의 첫 만남
다큐멘터리 속 조선은 약 100여년 전부터 영어에 국운을 맞기는 모습이 보여졌습니다. 최근 독도에 관한 문제로 민간 외교관이, 특히 영어를 잘 하는 민간 외교관이 절실히 필요한 시점에서 한국영어의 부흥기를 꿈꾸는 일인이 바라본 영어 다큐, 한국인과 영어, 2부 조선, 영어를 만나다를 함께 보시죠.
EBS 다큐 한국인과 영어 2부 - 조선, 영어를 만나다 방송 캡쳐
재미있게 읽은 책, '영어 조선을 깨우다'의 요약판인 듯 내용도 비슷하고, 전개도 비슷했습니다. 이 다큐에서는 조선이 영어를 접한 초기의 모습에 대해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조선이 영어를 접하고 얼마 안 되었을 무렵, 영어 능통자의 부족으로 영어 숙련자들은 무척이나 대우 받는 모습이었습니다. 오늘 날 대한 민국에서도 이는 비슷합니다. 영어를 잘 하는 사람이 일반적으로 더 높은 연봉과 대우를 받고 있지요. 그렇다 보니 한국인 대부분이 영어 실력을 향상시키기 위한 부단한 노력이 사회 전반에서 보이고 있습니다. 다만 이런 노력을 돈벌이에 악용하는 사람들이 득실득실한 것이 아쉬울 뿐입니다.
조미 수호 통상 조약 재현 장면
1882년 미국과의 조약 체결로, 우리나라는 공식적인 영어 사용자와의 만남이 이루어집니다. 중국을 제외하면 모든 나라가 오랑케로 보였던 조선에게는 획기적인 사건이었죠. 서양 오랑케와의 첫 만남은 녹록치 않았습니다. 이유인즉, 당시 조선에는 영어 사용자가 단 한 명도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어렵사리 청국 역관의 도움으로 미국과의 조약을 체결하였습니다만, 당시 이중통역으로 조약이 마무리 되었습니다.
이중통역이란, 우리가 한문으로 글을써서 청국에 넘기면 청국은 영어로 미국인에게 이야기 하고, 미국인이 영어로 청국에 이야기 하면 청국에서는 한문으로 조선에 의사를 전달해 주었던 불편한 통역 방식을 말합니다.
3 한국인이 처음 만난 문장은 무엇일까?
이 조약 이전에 비공식적으로도 서양 오랑케와의 만남이 여러 차례있었습니다. 비공식적으로 한국인이 처음 들었던 영어 문장은 아무래도, "I do not understand"라고 판단 됩니다. 당시 영국 선장과 조선 관군의 대화는 그림, 글자, 몸짓으로도 통하지 않았습니다. 이 원어민의 입에서는 'I don't understand.'만 연신 터졌나왔고, 이 내용이 그의 항해 일지에 적혀 있습니다.
조선인과의 대화를 묘사한 선장의 일기, 조선인의 말을 이해할 수 없다라는 표현이 보인다. 'I do not understand'
만약 우리가 영어를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미국에 홀로 남겨졌다고 생각하면 딱 맞는 상황이 아닌가 합니다. 우리 입에서도 '이해가 안 돼요'라는 말만 되내이지 않았을까요?
고종의 선택
이 무렵 바다 건너 일본과 청은 서양의 압박에 이기지 못해 문호를 개방한 상태였습니다. 문호개방의 단점도 있었겠지만, 일본과 청국은 이미 조선보다 엄청난 발전을 이룩한 상태였습니다. 서양 열강이 보기에 일본과 청은 좋은 먹잇 감이었다면, 일본과 청이 볼 때, 조선은 너무나 먹음직한 먹잇감이었습니다. 업친데 덮친격으로 미국, 영국, 프랑스 러시아까지 조선의 개방을 압박해오고 있었습니다. 당시 국왕 고종은 고심 끝에 미국이라는 카드를 선택하기에 이릅니다.
조선의 미국에 대한 인식
3 영원한 우방 미국, 조선의 러브콜을 받다
미국의 도움을 선택하게 된데는 당시 일본에 파견한 조사시찰단의 보고 때문이었습니다. 시찰단은 일본의 발전상을 목격하고 서양 문물의 위대함의 보고합니다. 그 보고는 고종의 마음을 변화시키는데 큰 역할을 한 것 같습니다.
일본을 상태로 시찰단을 파견하다
우선, 조선 시찰단은 이러한 일본의 발전을 보고 놀란 것은 둘째이고, 엄청난 위기의식을 느끼게 됩니다. 1000년 이상 일본에 문물을 수출해왔던 조선은 처음으로 일본의 문물을 수입해야 할 지도 모르는 처지로 전락한 것을 깨달은 것이죠.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서라도 다시 일본 보다 우위를 차지하고 싶었을지도 모릅니다.
조선의 영어에 대한 인식
게다가 일본은 이미 미래에 대해 조선 보다 민감하게, 그리고 정확하게 예측하고 있었습니다.
일본의 미래 예측
드디어, 조선 왕실은 실제 서양(미국)은 어떤지 알아보기 위해 미국으로도 보빙사절단을 보내게 됩니다.
보빙사 일행
미국에서 바라본 보빙사절단
조선의 유명 엘리트들과 주요 인사로 구성된 보빙 사절단은 일본에서 받은 충격 이상의 충격을 미국에서 느꼈을 것입니다. 특별히 전기와 고층 빌딩에 심각한 충격을 받지 않았을까 개인적으로 생각합니다.
당시 미국의 모습
미국의 실체(?)를 깨닫게 된 조선
4 영어 열풍이 조선반도에 상륙하다!
이제, 조선은 서양 열강의 압박, 일본의 위협을 극복하기 위해 기댈 곳은 미국 뿐이라는 확신을 품습니다. 미국은 침략 야욕도, 영국의 지배에서 벗어난지 얼마 안 되어 조선의 사정을 잘 이해할 것이라는 생각이었습니다. 미국과의 소통을 위해 영어 장려 정책이 조선에서 급물살을 타게 됩니다. 그리고 영어를 잘 구사하는 사람들이 각종 수혜를 얻게 되는 영어 열풍이 시작됩니다. 생각보다 오래전 부터 이 땅에는 영어가 성공의 강력한 도구로 자리 잡게 된 것이죠.
영어 능통자를 구하기 위한 학교 설립 - 육영 공원
영어 열풍에 걸맞는 영어 교육기관, 육영 공원을 왕명으로 설립하게 되었고, 마치 과거 시험과 같이 왕(고종)이 육영학교의 영어 시험을 직접 주관하기도 하였습니다.
5 왕립 영어 학교의 영어 교육은 어떻게 가르쳤을까?
이 왕립 영어 학교의 영어 교육 방법은 직접 교수(교습)법 이었습니다. 직접 교수법이란 학생들에게 목표 언어(배우고자 하는 언어)로 수업을 진행하는 것이죠. 다시 말해 영어로만 수업을 진행했다는말입니다. 직접 교수법은 바로 엄마표 언어 학습과 일맥 상통합니다. 직접 교수법을 통해 학생들은 상황과 반복을 통해 언어를 익히게 됩니다. 또한 엄마가 아이를 가르치듯, 소리와 사물(그림, 상황)을 일치시키면서 가르쳤고, 그 효과는 대단했습니다. 오늘날 아무런 효과를 내지 못하는 - 혹은 미미한 효과를 내는 - 이 땅의 학교와 학교 영어 선생님, 영어 학원과 영어 강사들은 반성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시점입니다.
직접교습법을 영어 교수 방법으로 채택하다 - 선택의 여지는 없었죠. 교사들이 한국말을 할 줄 모르니
그리고 이 학습법의 효과를 만들어 내는 요소 중 하나는 엄청난 학습량이었습니다. 매일 시험이 있었고, 이 시험을 통과할 때까지는 집에 보내지 않을 정도로 철저한 학습관리가 있어, 엄청난 학습량이 더욱 빛을 발했다고 생각합니다.
당시의 영어 단어 학습량
10개월에 3천단어라는 것은 셈을 좀 해 본다면, 1달에 300단어, 하루에 10단어 이상의 학습이 이루어졌다는 계산이 나옵니다. 별것 아닌 것 같아도, 3000단어는 우리나라 고등학교 졸업자들이 가진 학습량과 같습니다.
6 왜, 그렇게 영어 열풍이 100년전 조선을 휩쓸었을까?
나라를 살리고, 서양과 교류의 물고를 트기위해선 영어 능통자가 절대 다수 필요했던 시기였습니다. 당연히 출신과 상관 없이 영어 능통자가 대우를 받거나 고위 관직에 나갈 수 있는 환경이 열리게 된 것이죠.
영어 능통자의 필요성!
아직 졸업을 못했어도 영어만 잘 한다면...
이하영이란 분도 출신은 미천했으나 영어를 능숙하게 구사하면서 정부 요직을 두루 거친 것으로 역사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비단 이하영뿐 아니라, 양반 출신이 아닌 경우엔 더욱 목숨 걸고 영어를 공부하는 동기를 주었습니다. 영어 하나로 인생이 바뀔수 있는 기회였으니까요.
윤치호가 바라본 이하영
조선이라는 일국을 살릴 방법으로 여겨졌던 영어, 당시 입신양명의 수단으로 여겨졌던 영어가 오늘날 대한민국에서도 그대로 재현되고 있다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백년 넘는 세월 속에서도 아직 영어 능통자가 부족하다는 것에 속이 타고, 마음이 상하는 것은 어쩔 수가 없습니다. 더 아쉬운 것은 이를 악용하여 돈을 벌려는 사람들이 이 땅에 넘쳐난다는 것입니다.
6 아쉬움을 뒤로하고
조선을 휩쓴 영어 열풍이 100년이 지난 지금도 사그라 들지 않음을 아쉬워하며, 한국인과 영어 제 2편 '조선, 영어를 만나다'의 정리를 마칩니다. 다만 이제는 영어 장사꾼들이 사라지고, 엄마에게, 부모님에게 공짜로 모국어를 배웠듯, 영어도 모국어 처럼 자연스럽게 배울수 있는 환경을 이 땅에도 만들고 싶다는 제 꿈이 더욱 부풀어 오릅니다.
영어 자유구역 대한 민국을 꿈꾸는 여러분도 제 생각에 힘을 더해주시고, 좋아요로 공감해주시면 제가 더 힘이 날 것 같네요. 이 블로그에서 저와 함께 좋은 영어 습관 다들 습득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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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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